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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 미토우 (未到)食 2023. 1. 4. 01:26
미토우라는 식당을 처음 알게 된 건 2019년 여름이다.
당시에 Eater라는 유튜브 채널의 Omakase 시리즈를 종종 보곤 했는데, 하루는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에서 일본어 듣기 공부를 한답시고 화면을 끈 채 이어폰으로 소리만 들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끝까지 집중해서 듣기는커녕 도중에 잠이 들었고, 도착할 때쯤이었나, 잠에서 깨고 보니 한국어 나레이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국 식당도 있었어?' 하며 영상을 확인했고 이것이 내가 미토우를 알게 된 우연한 계기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t_i5fgVnkQ
Omakase 시리즈 미토우 편. 가이세키 요리를 한국에서 오마카세로 경험해볼 수 있는 식당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는 친구들과 다 같이 방문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쯤 영국으로의 출국을 앞두고 있었고 준비 과정에서 비용 지출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가장 근본적인 지갑 사정이 해결되지 않아 나중을 기약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새해가 되고, 내가 우중충한 런던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는 동안 친구들은 미토우를 대관하여 신년회를 진행하며 나에게 사진과 후기들을 보내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몇 달이 지난 뒤 미토우는 미쉐린 1스타를 받았고 아직도 그 별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예약이 전보다 어려워져서 좀처럼 찾아가기 힘들었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좋은 기회가 생겨 크리스마스 직전 금요일 저녁에 방문할 수 있었다.
旬の香, 가이세키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콜키지로 준비한 크룩, 그랑 뀌베. 사실 이 날 중부지방에 폭설이 내려서 예상 시간보다 1시간 30분이나 늦게 서울에 도착했다. 예약한 시간을 지키는 것에 매우 민감한 나는 민폐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지라 강남구청 역에서부터 전력질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15분 밖에(?) 늦지 않았고, 그때는 아직 첫 접시가 서비스되기 직전이었다.
첫 번째로 나온 북방조개, 이쿠라, 브로콜리, 모즈쿠, 그리고 노른자 소스.
개인적으로 북방조개를 맛있게 먹어본 적이 손에 꼽는데 이 날 먹었던 것은 단연 1등이었다. 씹을 때마다 풍기는 은은한 조개의 단맛이 모즈쿠의 산미와 굉장히 잘 어우러졌다. 노른자 소스의 꾸덕함도 일품.
니혼슈 페어링도 함께 요청드렸는데, 토요비진 준도이치즈 (東洋美人 醇道一途)를 가장 처음으로 내주셨다. 개인적으로는 토요비진의 잘 짜인 밸런스는 술만 마셨을 때 보다 음식과 같이 했을 때 그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미토우의 시그니처인 모나카. 닭 안심으로 만든 파테와 닭 간 무스, 그 위에는 잘게 부서진 피스타치오가 뿌려져 있다.
모나카의 뚜껑을 덮고 한 입 베어 물면 닭의 진한 감칠맛이 퍼진다. 기억으로는 연신
(비속어가 조금 섞인)감탄만 내뱉었던 것 같다.술을 안 마실 수가 없는 제주 옥돔이 들어간 진한 스이모노. 처음에 무인 줄 알았던 배추뿌리는 국물을 잔뜩 머금고 있으면서 감자와 비슷한 느낌의 인상을 주었다. 옥돔은 살짝 구워서 내주셨는데 스모키한 향과 국물에서 풀어지지 않을 정도의 단단한 식감이 좋았다.
두 번째 니혼슈 호오비덴 츠루기 (鳳凰美田 劔). 대체로 단 맛이 많이 나는 호오비덴이지만 카라구치의 특징이 많이 묻어났다. 깔끔하게 끊어지는 듯한 피니시 때문에 츠루기 (검, 劔)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다음으로는 두 가지 요리가 한 번에 서비스되었다. 실파와 시소 등을 광어로 말아서 안키모와 같이 내주셨고, 볏짚향이 가미된 삼치회를 두툼하게 썰어 김으로 만든 소스와 채소를 곁들여 주셨다. 광어는 그냥 먹어도, 안키모에 찍어 먹어도 맛있었고 속을 채운 채소들의 향이 너무 조화로웠다. 저 정도로 두껍게, 그리고 크게 썰린 삼치회는 먹어본 적이 없는데 담백한 기름기라는 모순적인 표현이 어울리는 맛이었다. 김소스와 함께 입 안에 꽉 들어차는 생선의 풍미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무래도 연말이다 보니 콜키지로는 샴페인을 준비했다. 병을 오픈하자마자 공간에 퍼지는 브리오슈 냄새가 더욱 식욕을 돋웠다. 그 간의 고생을 이 한 잔으로 보상받는 느낌. 준비해준 친구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부드럽게 깔린 강화도 순무로 만든 소스 위에 게살고로케, 카니미소와 유자 터치로 마무리한 요리. 게살도 게살이거니와 순무 베이스의 소스가 정말 맛있었다. 텍스쳐가 살짝 느껴질 정도로 갈려있어 부드러운 죽을 먹는 듯한 질감과 유자가 주는 상큼한 킥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제주 은갈치를 구워 포항초와 카라스미를 곁들여 주셨다. 평범한 밥상에도 자주 등장하는 갈치와 시금치 같은 대중적인 재료 (물론 여기서 제공되는 원물의 수준은 다르겠으나)의 조합이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다니. 추운 겨울 제철을 맞아 단맛이 오른 포항초는 결코 갈치에 밀리는 조연이 아니었다.
식사로는 셰프님의 부모님께서 직접 농사지으신 쌀로 솥밥을 해주셨고, 도정되기 전과 후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다. 쌀의 퀄리티는 두 말할 것도 없으며 개인적으로는 쌀 트레이(?)의 디스플레이가 놀라웠다. 소박하지만 재료에 대한 자신감이 엿보였고 기대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친절한 설명은 덤.
다이닝에서 먹는 흰쌀밥은 정말 오랜만이다. 아무래도 일식 다이닝에서는 금태와 같은 재료가 올라간 솥밥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윤기가 흐르고 수분이 살아있지만 전혀 질지 않은 밥은 어떻게 짓는 것일까. 오카즈로는 츠케모노, 아카미, 명란, 게르치튀김이 제공되었고 한 번은 밥만 따로, 한 번은 밥과 같이 즐기면서 돼지감자가 들어간 미소시루로 따뜻하게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식사와 함께할 수 있는 니혼슈를 부탁드렸더니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나마슈를 준비해 주셨다. 니와노우구이스 (庭のうぐいす)라는 이름의 술인데 뜻을 직역하자면 '정원의 휘파람새'이다. 나마자케 특유의 미탄산감이 강하게 살아있어 이 정도면 微를 빼고 그냥 '탄산감'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밥과 오카즈를 마지막으로 식사가 끝나는 줄 알고 한 공기를 더 받을까 했지만 오차즈케로도 내주신다고 하셔서 배를 아껴놨다. 깨소스에 버무린 도미살과 시소, 아라레, 와사비가 고명으로 나왔다. 조금씩 곁들여도 좋고 한 번에 다 넣어 먹어도 좋다고 하셔서 고명을 넣기 전 육수에 만 밥을 조금 맛본 뒤 모든 고명을 한 번에 다 넣어 먹었다. 깨소스 때문에 사골국물처럼 뽀얗게 변한 오차즈케를 한 숟갈 뜰 때마다 오늘의 행복한 경험이 끝나간다는 사실에 아쉬워했다.
밤 아이스크림, 군밤, 가장 밑에는 크렘브륄레가 깔린 디저트를 끝으로 약 3시간에 걸친 저녁식사가 마무리되었다.
음식의 맛, 재료의 퀄리티, 숨길 수 없는 디테일과 공간이 주는 편안함, 친절한 접객까지 뭐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미토우 (未到)는 '아직 이르지 않은 경지'라는 뜻을 담아 지으신 이름이라고 한다. 과연 두 셰프님이 다다르시게 될 경지에는 어떤 요리가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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